Egene K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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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노트 2010 / Artist's Statement 2010
 구이진 /  20111025 
그림을 그리면서 세상을, 그리고 사람을 좀 더 이해하고 싶어졌다. 그러려면 먼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지난 시간 동안 내 것이라고 믿어왔던 어떤 얼굴들이 나도 모르는 새 다양한 이유로 켜켜이 쌓여온 얄팍하고 일그러진 가리개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가리개들 너머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하지만 반복되는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나는 다시 스스로를 기대하고 판단하고 합리화하고 비교하면서 또 하나의 허상을 만들어내려 할 뿐이었다. 그런 자신을 보고,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런 인위의 흔적들이 내 삶과 그림에 묻어 나오는 것을 보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던 시간이 있다.

이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었던 내게 이야기들이 다가왔다. 나는 지난 몇 년간 그 세계를 헤매며 여행해 오고 있다. 오래된 이야기들은 지혜롭게 늙었으면서도 아이처럼 천진하고 소뱍한 현자 같다. 그들은 살아가는 시간과 장소가 달라도 변하지 않는 삶의 모습을 독특한 눈길로 바라보게 도와준다. 일상화된 속임과 최면에 지치고 무뎌진 눈이 보지 못하던 삶의 어떤 얼굴들은 오히려 비현실적이라 여겨지는 이야기들 속에서 솔직하고 날카롭게 드러난다. 다양한 삶의 요소들을 압축해서 담고 있는 오래된 이야기들은 문장이라기보다 강렬한 그림에 가깝다. 수수께끼처럼 다가온 그림들을 내 나름대로 생각하고 음미하다가 그것들이 내 자신의 이야기와 연결될 때, 마침내 내 안에서 새로운 그림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매번 같은 방식이 반복되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마음에 맺힌 이미지들을 그려내는 정도였지만 이야기는 조금 더 적극적인 제안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주어진 수수께끼를 풀고자 한다면, 내가 만난 오래된 이야기와 내가 살아가는 삶과 내가 그리는 그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삶이란 자신이 가진 욕망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그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 아닐까. 유독 많은 옛 이야기들이 갖가지 욕망 앞에서 인간이 내리는 다양한 선택에 관한 내용을 들려준다. 섣불리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근원적이면서도 너무나 상투적인, 쉽게 내던져 버릴 수도 없고 마냥 얽매여 지낼 수도 없는 욕망들. 내가 만난 옛날 옛적 먼 어느 나라에 살았던 한 사람이 품고 있던 욕망과 지금 여기에서 내가 씨름하는 욕망은 그리 다르지 않다. 홀로 마법의 성에 고립된 처녀가 갖고 싶은 것을 담보로 한 금기를 깨지 않고서는 자유를 얻을 수 없을 것이며, 아끼는 구두에 집착한 나머지 빵을 밟고 올라선 소녀가 스스로 빵에서 내려오지 않고서는 격리의 고통이 끝나지 않는 것처럼, 온갖 욕망의 딜레마들이 나 자신의 사연과 겹쳐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고민하고 흔들리고 선택해야 했다. 좋은 이야기들은 이런 삶의 장면들을 날카롭게 포착해서 직면하게 하는 생명력을 갖고 있다. 이렇게 나는 이야기라는 현명한 뮤즈의 도움을 얻어 내가 보는 세상을 관찰하고 그려 나가는 방법으로 다른 이들에게 말을 건네려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런 내 존재의 목소리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고 공감해 준다면, 내가 세계와 연결되어 대화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끈의 또 다른 한 쪽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전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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